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는 우리가 아는 대로 조선의 마지막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의 (재위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 ~ 1897년 10월 12일)의 부인이다.  민후 (閔后)는 1851년 11월 17일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지만 1895년 10월 8일 새벽, 거처인 경복궁 내 건청궁에서 대원군을 앞세운 일본군과 폭력배들에게 피살되어 (을미사변) 45년의 짧은 비극적 삶을 마감하였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이 되면서 민후는 명성태황후로 추존되었다.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이 1968년에 발행한 연표 『부록: 일본의 100년 신문에서 보는 明治, 大正, 昭和』를 보면 1895년 10월 8일자에 “일본군과 壯士, 조선의 대원군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민비를 살해 (경성사변)”, 10월 17일에는 “미우라(三浦梧樓)주조공사, 경성사변 용의로 소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을미사변에 대한 기록은 없고 다만 1896년 2월 11일 친러 쿠데타가 일어나 친일내각이 무너졌고 며칠 뒤 일본 야당들이 정부의 조선정책문책결의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된 사실만을 언급했다. 그 후 재판을 통해 관련된 일본인 전부를 무죄 석방한 사실도 없다.

황후 척살의 현장에서도 소지품들을 도난당했고, 황후의 사진이 있었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피해자의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은 모두 사라졌다. 1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황후의 초상사진 조차 한 장도 없다.

1895년 10월 8일 사건현장에 대한 기록은 당시 일본의 충격적 만행에 분노한 서울 주재 외교관들, 외국인 고문들, 서양 선교사 등이 남긴 사건의 목격담과 조사보고서가 유일한 1차 자료인 셈이다.

사건에 대해 가장 먼저 서술하기 시작한 사람은 살해사건에 직접 가담했던 일본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였다. 그는 일본정부가 국제적 비판여론에 밀려 사건 관련자 56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구속시키자 수사를 받는 동안에 흥선대원군과 왕비의 권력다툼으로 대원군이 사건의 배후임을 주장하는 내용의 『조선왕국』을 쓰기 시작하였다.  

기쿠치 겐조는 50년 이상 조선에 살며 많은 저술을 남긴 언론인이며 식민사학자였다. 특히 황후시해에 직접 가담했기 때문에 그가 발표한 황후와 을미사변에 대한 저서들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大院君附 王妃の一生』(1910) 『조선근대외교사(朝鮮近代外交史)』, 『近代朝鮮史』 (1939)등의 저서들은 결과적으로 한국 근대사 연구에서 많은 왜곡과 오류를 배포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명성태황후에 대한 연구는 크게 4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왔다. 첫째는 황후의 역할과 외교적 영향에 관한 것이다. 황후는 고종의 정치적 파트너였고 외교정책을 좌지우지 했으며, 따라서 청나라, 러시아와 대결하던 일본의 암살의 표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황후 척살 사건, 즉 을미사변의 정확한 규명이다. 사실상 일본 정부가 일본 공사관 요원들과 장사(壯士)들의 개입을 인정하여 이들을 재판에 회부하였으나 모두 무죄방면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한국인 몇 명을 처형하는 것으로 사건은 덮어졌다. 셋째는 황후의 사진 발굴이다. 그 동안 서양의 몇몇 신문, 잡지 등에 황후의 사진과 스케치가 소개 되었으나 모두 진영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한 장의 사진이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역사적 인물의 실체는  그가 남긴 휘호, 초상사진, 음성녹음, 유품과 살던 집 등 “구체적 증거물”을 통해 후대에 이해되기 때문이다. 유품하나, 기록 한 점 없는 사람은 구체적인 존재로 인식이 되기 어려우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어있다.  마지막 연구 분야는 인간 명성태황후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공식 기록의 특성상 왕비의 언행에 대한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연구에 어려움이 크다. 황후의 관심사와 성격을 직접 증언하는 기록물로는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한글로 쓴 편지글이 다수 있을 뿐이다.  황후에 대한 많은 부정적이고 과장된 소문들이 전해지고 있는 반면에 긍정적인 평가는 직접 황후를 만나본 소수의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이 있을 뿐이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예를 들면 황후가 “8세에 고아가 되었다”는 기쿠치 겐조 기록의 오류는 많은 한국의 역사학자들까지도 그대로 답습하였는데 이것은 1980년대 까지도 자료의 부족으로 매우 제한적인 연구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명성황후의 모‎친 한창부부인 이씨는 황후가 23세가 될 때 까지 생존하였다.

내용의 진정성에 대해 논란이 많지만, 사건현장에 있었던 조선정부 고문관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의 10월 9일자 비밀 보고서와 일본공사관의 우치다 사다쓰지(內田定槌)영사의 12월 21일자 비밀 보고서가 뒤늦게 알려졌다. 한국인 학자들에 의한 연구는 19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14년에는 (무라카미코도)村上浩堂∙(코도목도)後藤默童의 『망국비밀-なみだか血か-』이 나왔고 1938년 호리구치구마이치(堀口九万一)의 「閔妃事件の思ひ出」 가 『軍事史硏究』 3-1에 실렸다. 황후 시해 사건에 실제 행동대원으로 가담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가 쓴 회고록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1946)이 한국에서는 1965년에 『민비시해기』 조덕송역으로 소개되었다.

코다니 야스타로(小谷保太郞)의 『閔后暗殺』(1962), 야마베 켄타(山邊健太)의 「閔妃事件について」(1962)가 비교적 일찍 나왔다. 1968년에 노계현(盧啓鉉)은 「閔妃被殺의 眞相과 韓日政府의 僞裝處理」를 발표하였다. 1980년대에 朴宗根의 『日淸戰爭と朝鮮』 (1980),이치가와 마사아키(市川正明)編 「韓國王妃殺害事件」(1981) 등이 알려 졌으나 한국내 연구는 크게 촉진되지 않았다. 

다수의 한일 양국민이 명성태황후의 비극에 관심을 갖게 만든 저서는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閔妃暗殺』(1988)이였다. 한국에서는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김은숙역, 1999)으로 출간되었는데 소설가가 쓴 작품으로 여겨져 연구서로 인정되지는 않지만 가장 널리 읽힌 저서이다.   

1992년 최문형의 『명성황후시해사건』가 발표 된 이후 「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이배용,1995), 신국주의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재평가』가 있다.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2000)은 한말과 대한제국기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연구를 촉발하였다. 이 무렵 영국인 존베리만은 『민비시해와 영국의 대(對) 조선정책』을 한국정치외교사학회에서 발표하였다. 한영우의 『명성황후와 대한제국』(2001), 최문형의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2001), 조선왕실 대비와 대원군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제시한 변원림의 『고종과 명성』(2002)등,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이민원, 2002) 『명성황후 시해사건: 러시아 비밀문서』(이영숙, 2006)등이 출판되었고 이기대편 『명성황후 편지글』(2007)은 황후의 한글편지를 다루고 있다. 일본외교문서를 통하여 황후시해의 배후와 목적을 추적한 김문자의 『朝鮮王妃殺害と日本人』(2009)는 국내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김승일 역,2011)로 소개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김영수의 『미쩰의 시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2012)와  『명성황후 최후의 날 서양인 사바찐이 목격한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억』(2014)은 주로 러시아에서 찾아낸 자료를 바탕으로 을미사변을 재구성하였다. 2000년대부터는 대한제국과 고종을 재평가 하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김지명 Ph.D.

(사)한국문화유산교육연구원 원장

한국근대사전공